●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는 오직 노동자만 보고 갑니다.
자녀에게 말하지 못하게 된 유언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지회 조합원동지 여러분!
다음의 글은 제가 자녀에게 말하고 싶었던 유언이며,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던 1991년 상반기에 벌어진 ‘포항제철(현 포스코)노조파괴공작’ 대한 것입니다. 제가 자녀에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 긴 글이어서 조금은 지루하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기 전에 너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유언이 있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열풍이 짚불처럼 타올랐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노동조합 설립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맞서 사용자들은 속칭 ‘구사대’와 ‘용역’들을 동원하여 노조파괴공작을 일삼았지. 거기다가 당시 집권층은 노조를 빨갱이로 부르며 불온시하게 여기고 공안조직 즉, 안기부와 경찰을 동원하여 노동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정부는 집회와 시위현장에 딱정벌레처럼 생긴 진압복으로 중무장한 전투경찰과 경무장하고 흰 헬멧을 써서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특수경찰을 동원하여 최루탄과 철봉으로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며 지도부를 연행해 갔고 폭력과 고문을 일삼았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짱돌과 화염병 그리고 철봉으로 무장하게 피터지게 싸우는 게 다반사였다.
전국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포항제철(현 포스코) 안에서도 민조노조 설립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지. 당시 박태준회장은 노사협의회 의장인 이명승씨의 노조설립 조언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새로운 노사문화’를 표방하며 이명승씨를 초대위원장으로 선출하였고 포스코노조를 설립하였다. 아마 사측에게는 노동조합을 미리 선점하면 노동자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야.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간접투표로 선출된 2대 노조위원장이 된 최창림도 회사의 꼭두각시였다. 물체에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2만 여명의 초대형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사측의 요구에 움직이지 않는 최창림 노조위원장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어. 이에 ‘민족포철’(민족의 피의 대가인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설립된 포항제철이라는 뜻)이라는 반대파 단체가 생겼고 사측의 꼭두각시인 집행부에 대한 비토운동을 하였지. 그래서 1990년, 민족포철의 대표였던 박군기씨가 조합원 직접투표로 3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사측은 그의 선출을 막으려고 조합원들에게 온갖 권모술수를 다 부렸지. 그 방해공작을 뚫고 그가 선출되었을 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슴이 뛰는 순간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입사 4년차에 나이는 만28세였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다른 대기업 노동조합은 투쟁으로 쟁취한 피의 결과물이었으나, 포항제철 노동조합은 회사의 입김이 들어간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에 이를 극복하는 것이 박군기 집행부의 소명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아마 사측에서 앵무새처럼 말하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모양이야. 아버지는 걱정하고 우려했어. 노와 사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데 조합원들을 노동운동 전사로 조직하지 않고 사측을 순진하게 믿었다가 한 방에 확 가버릴 것 같다는 걱정과 우려가 들었거든. 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어.
1991년 새해 벽두부터 박군기 집행부에 대한 비리와 추문에 대한 소문이 현장에 나돌기 시작했지. 누가 뇌물을 받았다니, 누가 룸싸롱에 갔다느니… 당시에 임금 및 단체협상에 나서는 첫 해였으니 조합원들의 지지가 확 올라가 있는 시기였어. 그리고 조합원들의 첫 행동으로 당연하게 입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황색 출근제복을 벗고 ‘사복출근투쟁’을 시작한 시점이었어. 조합원들은 열화같이 호응하였지. 노측의 속보경쟁에 사측도 맞대응하였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전단지를 어디 어디서 건 볼 수 있었어.
그런데 현장에 박군기 집행부의 비리와 추문을 비난하는 전단지(일명 찌라시)가 대량 뿌려지기 시작했고, 조합원들은 기대를 저버린 집행부에 대한 실망이 가득 하였지. 그리고 사측의 ‘사냥’이 시작된 거야. 현장에는 반장(현재 주임), 주임(현재 파트장), 과장(현재 리더), 부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손에는 ‘노조탈퇴서’ 들려 있었어. 노조원 중에서 집행부를 가장 비난하는 그룹부터 시작된 노조탈퇴는 사측의 처사에 가장 반발하는 그룹으로까지 이어졌어. 노조 탈퇴서를 얼마나 많이 받느냐, 노조 탈퇴율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관리감독자의 능력의 척도가 되었고 그 개 같은 자들은 노조탈퇴에 혈안이 되었지. 집행부와 대의원들의 갖은 노력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탈퇴러시에 속수무책이었지. 사측에서 말하는 ‘새로운 노사문화’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노조는 필요 없다’였던 거야.
노동조합 고지를 사수하려는 강성 집행부장과 대의원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온갖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고, 심지어 안기부와 경찰까지 동원된 노조파괴 공작에 어느 누구가 견디어 내겠니? 심지어 일반 조합원이 아버지가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어. 아버지는 관리감독자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노조탈퇴 종용 더욱이 너희 엄마와 결혼 날짜까지 잡은 상태였어. 내 주변에 동지가 거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어. 그래도 나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개들의 손에 노조탈퇴서를 쥐어주긴 싫어서 노동조합 사무실에 찾아갔고, 현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박군기 위원장의 직무대행을 하는 부위원장 앞에서 직접 노조탈퇴서를 썼는데 멍해지더라.
노동조합을 탈퇴한 그날, 담당 반장이 위로주를 사줬는데 통음을 했지. 그리고 ‘언젠가는 포항제철에 노동조합이 바로 세워질 날이 있을 것이다’라며 사측을 오만가지 비난을 쏟아냈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린 어느 날, 책장 한켠에서 종이뭉치를 발견했단다. 그것은 1991년 1월부터 4월까지 현장에 뿌려진 전단지였어. 노측에서 발행한 포철노보와 속보, 성명서, 사측에서 발행한 노무소식과 속보 그리고 유령단체의 찌라시였어. 이전에는 노조는 물론 회사의 전단지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박군기 집행부에 대한 기대와 사측의 대응이 재미있어서 100여 쪽에 달하는 전단지를 한 장, 한 장… 모아놓았던 거 같아. 긴 세월 동안에 전단지가 혹시 파손될까 봐 달력 사이에 전단지를 넣은 후, 그것을 A5 비닐 화일에 보관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다.
‘이것이 1991년에 벌어진 노조파괴공작의 전말을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사측에 대한 믿음의 결과를 증언할 것이다. 나는 포항제철에 민주노조가 우뚝 서는 날! 노동자가 우뚝 서는 날!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을 얼마나 갈망해 왔는지 후배들에게 말하며 이 자료를 전할 것이다. 혹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포항제철에 민주노조가 생기지 않으면, 내 자녀에게 유언하리라. 우리 아버지는 포항제철에 민주노조가 생기기를 얼마나 염원해 왔는지를… 그때가 되면 세월의 흔적에 누렇게 변한 이 전단지를 노동조합에 꼭 전하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조선독립을 꿈꾸며 35년 간, 가족도 모르게 태극기를 꼭꼭 숨겨둔 어느 백성처럼, 28년 간, 가족조차 모르게 꼭꼭 숨겨둔 1991년의 포항제철노조파괴공작 자료가 이제 빛을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용노조가 자신들의 자료를 억만금을 줘서 팔라고 해도 결코 넘기지 않고 ‘박군기 노조위원장’님의 뜻을 이어 받을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지회에 아낌없이 기부할 것입니다. 끝으로 섬안 큰다리에서 자살하신 박군기 노조위원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9년 2월 4일 설날 전날
포항 생산기술부 대의원 김형중
추신 : 증거사진은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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